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약진 운동 (문단 편집) == 전말 == >'''七年超[[영국|英]] 十五年赶[[미국|美]]''' >''칠년초영 십오년간미'' > - [[마오쩌둥]][* 이 대사는 [[중국]] 근현대사를 다룬 [[장예모]]의 영화 [[인생(영화)|인생]]에도 촌장의 입을 빌어 나온다. 촌장은 "제련한 [[철(원소)|철]]로 [[대만]]을 정벌하고, [[영국|영]][[미국|미]]를 앞서 나갈 것이며, [[인공위성]]을 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 >7년 안에 [[영국]]을 초월하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는다. 대약진 운동은 천하의 마오쩌둥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고 뒤를 이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리더쉽이 중국을 휘어잡지 못하자 발생한 [[중국]]과 [[소련]]의 [[공산주의]] 영도권 경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탈린이 살아있던 시절, 중국은 스탈린으로부터 기술, 자본, 건축자재 등을 지원받고 [[소련]]이 1930년대에 [[우랄 산맥]]과 [[우크라이나]]에서 행했던 대규모 중공업 건설을 벌였다. 이 시기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의 경제정책에 대해 참견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무리다 싶은 것은 가차없이 취소하거나 규모를 삭감하는 등, 중국의 경제건설에 제재를 가했다. 또한 자신의 경제지원에 대한 대가로 막대한 양의 중국의 자원을 수탈하듯이 챙겼다. 마오쩌둥은 이 점에 대해 크게 불만이었으나, '공산권의 [[교황]]'이나 다름없는 스탈린에게 저항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흐루쇼프는 서방과의 화해를 도모하는 등, 마오쩌둥의 눈에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물로 보였다. 흐루쇼프의 집권을 기점으로, 마오쩌둥은 서서히 소련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처녀지 개간 사업]]을 통해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선전하자, 마오쩌둥은 자신들이 소련에 뒤지지 않을 수 있다는 증거로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했고, 이는 대약진 운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천윈]] 등 현실적인 방법을 제안한 전문가들은 "제국주의 간첩", "태만에 빠진 부르주아"로 몰려 가혹한 비판을 받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마오쩌둥은 공공연하게 "배운 사람들은 보잘것 없으며, 무식한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유식하다"는 반지성주의적 발언을 지껄이면서 전문가들을 무력화시키고 기술과 자본을 등한시하고[* 정작 모델이 된 소련의 5개년 계획은 미국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이루어졌다. 1930년대 미국과 소련간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된 후 미국은 대공황 시기 기술자들의 경험을 유지하기 위해 규모가 큰 소련의 일감을 수주하여 수백 개의 공장을 설계하고 수천 명의 소련 기술자를 훈련시켰다. 그 과정에서 중공업 기술 뿐 아니라 공장을 운영하는 경영 노하우가 소련에 일부 적용되게 된다. 중국이 등한시한 경영 노하우는 소련이 [[T-34-76|군사 장비를 대규모로 양산할 때]] 큰 효과를 발휘했다.], 수억의 인민들을 무제한으로 투입하였다. 하지만 [[마오쩌둥]] 본인은 [[문맹률]]이 80%대에 달했던 당대 중국 기준으로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베이징대학]] 사서로 일하면서 고등교육도 간접적으로 받는 등 고학력자였고, 수많은 서적을 탐독하고 공산당 내 논쟁에 참여하면서 문장력이나 연설실력은 중국 제일을 달리던 인물이었다. 즉, 반지성주의를 내세우면서 정작 본인이 지성인의 반열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사업은 마오쩌둥이 보기 좋은 방식의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남의 나라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도 안 하고 타국의 도움없이 계획을 추진하려니, [[무리수]]가 작렬했다. 일단 모든 인민들을 생산 단위로 묶어 취식을 함께 하도록 했다. 덤으로 각 마을마다 할당량을 부과하여 생산하게 했으며, 모든 마을에 소형 [[용광로]] 즉, [[토법고로]]를 배치하여 대형 [[공장]]을 대체하고 [[강철]]과 [[식량]]을 생산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근대화]]"라는 단계를 거치기 위해서는 [[철(원소)|철]]이 꼭 필요하다. 공장, 건물, 비행기, 선박, 차량, 무기 등 철이 안 쓰이는 곳이 없기 때문. 그래서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의 중요 과제 중 하나가 제철소 건설이었고, 우리나라의 1960~70년대 [[포스코|포항제철소]] 건설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리고 제철소 건설에 투입한 자금이 바로 [[일제강점기]] 시절 보상금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근대화 과정에서 철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해주는 예. 저런 [[소련]]식 공업화 계획은 [[1930년대]] 후반 [[만주국]]의 [[일본인]] 관료들이 복사해서 그대로 시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위 '만주 인맥'이라고 해서 [[일제강점기]] 시기 [[관동군]]과 [[만주국]]을 경험한 [[만철]] 연구소 출신 관료, 전문가 그룹이 이후 한일 양국 정권에 상당부분 포진해 있었던 것이 20세기 중후반 양국 경제정책을 수행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당연히 [[소련]]의 영향을 받아서 정부가 주도하는 급진적 공업화를 추진했는데, 북한도 초기에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1970년대 초반까진 [[제3세계]] 국가들 중에선 경제발전이나 생활 수준으로도 선두권이었다. 1970년 [[UN]] 자료를 보면, [[대한민국]]은 국내총생산 순위가 세계 39위, [[북한]]은 세계 54위다.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순위가 앞선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대한민국의 인구가 북한보다 2배였다. 1972년을 보면 우리나라가 2,700만, 북한이 1,300만으로, 이 시기에 국내총생산에서 북한을 앞선 것은 인구빨의 영향이 크다. 이때 성공적인 경제 성장을 이룬 북한은 70~80년대를 거치며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냉전이 종식되기 전까지 아시아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 중에선 가장 부유했다. ~~당시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 경제가 정상인 나라가 없긴하다…~~ 다만 그 이후에 '계획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에 '국방/경제 병진 노선'을 택하면서 군사비 부담으로 주저앉게 된다. 물론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서 받은 '막대한 원조'도 한몫했다. 실제 계획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이 부각되기 시작하고 [[소련]]과 [[동유럽]]의 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한 1960년대 말부터 독립채산제 등 경제개혁에 관한 논의가 북한 내에서 있었으나 곧바로 [[김일성]]의 확고한 1인숭배체제가 확립되면서 그냥 묻혔다. 결국 [[북한의 80년대 3대 실정|1980년대의 대삽질]]과 [[소련 해체]]의 영향으로 경제가 붕괴되면서, 북한의 경제 정책도 실패로 돌아간다. 크게 농업집단화와 [[토법고로]]로 나누어지며, 함께 진행된 [[제사해운동]]도 워낙 영향이 커서 대약진 운동을 설명할 때 들어간다. 이외에 여러 가지 정책이 있었다. 이 당시에 각 기업소에서 목표달성을 위해 야근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1일 10시간, 주 60시간 근무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중국정부 수립 이래로 가장 노동환경이 안 좋았을 때였기도 했다.(…) 허무하다면 허무한 결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